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드리 헵번 (문단 편집) === 유년기 === [[벨기에]] 태생.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 1889-1980)[* 헵번의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도 부유한 영국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헤임스트라 여[[남작#s-1.1]](Ella barones van Heemstra, 1900-1984)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을 했는데, 이곳에서 네덜란드계 여성과 첫 결혼을 했다 이혼한 전력이 있었다. 어머니 엘라 또한 1919년에 영국계 [[네덜란드]] 귀족인 구스타프 아돌프 크발레스 판어포드(Hendrik Gustaaf Adolf Quarles van Ufford)와 결혼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거주하며 아들 둘을 낳았으나 1925년에 이혼을 했다. 이 두 이혼남녀는 사랑에 빠져 1926년 9월 24일에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후 조지프는 영국의 '매클레인 왓슨 앤 컴퍼니' 사에서 일하면서 [[브뤼셀]]에 위치한 [[벨기에]] 지사로 발령을 받았고, 이곳에서 1929년에 딸 오드리를 낳았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아버지 조지프는 귀족 집안에서 자란 엄격한 성격의 어머니 엘라를 견디지 못하고, 1935년에 별거에 들어갔다. 이후 1939년 6월 24일자로 정식으로 이혼한다. 별거 후에 오드리는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 [[켄트(잉글랜드)|켄트]] 주의 작은 마을인 엘험(Elham)으로 이주한다. [[캔터베리]]와 [[도버]] 사이에 있는 이 시골에서 오드리는 조그만 지역 기숙학교에 다니며 발레 수업도 받고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별거 상태였던 아버지 조지프와도 가끔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아버지 조지프가 1939년에 성을 러스턴에서 헵번러스턴(Hepburn-Ruston)으로 바꿨을 때 그대로 따라간 것도 지속된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드리의 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영국에서도 득세했던 [[파시즘]] 운동의 후원자였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아버지 조지프는 열렬하게 활동하였고, 어머니도 [[파시즘]]에 동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조지프는 영국 파시스트 지도자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y)와 함께 [[뮌헨]]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식사를 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다만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평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윈스턴 처칠]]과 같이 통찰력 있는 인사들은 히틀러의 야심과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적어도 1938년 [[뮌헨 협정]] 체결 당시까지 꽤 많은 인사들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정책을 정상적인 입지 회복으로 여기고 어느 정도 양해해줬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파시스트에 대한 국민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어머니 엘라는 오드리를 데리고 [[네덜란드]]의 친정으로 피신한다. 이런 결정에는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보다는, 중립국인 [[네덜란드]]가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중립을 고수해 큰 피해 없이 전쟁의 참화를 모면했고,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란 낙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영국에 남아있던 아버지 조지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파시스트란 이유로 체포되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수감되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맨 섬]]에 억류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석방된 뒤에도 영국 내의 따가운 시선은 여전해서, 아예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조지프는 이곳에서 1950년에 30년 연하의 여성과 세 번째 결혼을 하여 말년을 보냈다.] 이때부터는 전처 엘라와 딸 오드리 등 가족 및 지인들과도 소식을 끊고 은둔해버려서, 오드리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버지 조지프가 석방 후 사망한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에 오드리의 첫 남편인 멜 퍼레어가 조지프의 행적을 수소문해 [[더블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두 부녀는 1964년 8월에 [[더블린]]의 쉘번 호텔에서 재회했다. 하지만 이미 셀럽이 된 오드리로서는 파시스트에 대한 여전히 나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계속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이후에도 두 부녀는 은밀히 다정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일랜드]]와 [[스위스]]에서 몇 차례 더 만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조지프의 병세가 악화된 1980년 [[더블린]]에서의 일로,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에 조지프는 사망한다. 이렇게 1940년 외가로 피신한 오드리는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내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살던 곳이 바로 훗날 [[마켓 가든 작전]]으로 유명해진 [[아른험]](Arnhem)이었다. [[아른험]]은 귀족 가문인 외가의 영지가 위치한 곳으로,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이곳 아른험 시장을 역임할 정도로 지역의 명망 있는 귀족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른험 시장 재직 이후에도 네덜란드 속령이던 [[수리남]] 총독을 2차례(1921~24, 1925~28) 역임하는 등 법률가, 행정가로 두루 인정 받던 명사였다.] 오드리가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왕가의 공주까지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부유한 명문 귀족의 손녀였던 셈이다. 하지만 [[1940년]] [[5월 10일]]에 독일군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무시하고 [[네덜란드]]를 진격로로 삼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 이런 유복한 생활도 산산히 깨진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네덜란드]], [[벨기에]]는 물론 [[프랑스]]까지 석권해버렸고,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각료들은 영국으로 피신하여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독일은 이후 점령한 네덜란드 지역에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Niederlande)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이때 국가판무관으로 부임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네덜란드의 도살자'로 불릴 정도로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20만이 넘는''' 네덜란드인들이 사망했을 지경이었다. 오드리 헵번 또한 영국식 성인 '헵번'을 쓰다가는 불이익을 받을까봐, 외가쪽 성을 따라 '에다 판헤임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지내야 했다. 결정적으로 외할아버지가 독일 점령군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지조를 지키는 바람에 집안 전체가 갖은 수난에 시달리게 된다. 친척 일부는 독일에 강제징용당했으며, 큰이모부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했다. 거기에 각종 자산을 압수, 징발당했고, 영지의 저택에서도 퇴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시달리다 못한 외할아버지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42년 가족들을 데리고 아른험 북동쪽 외곽의 펠프(Velp)로 거처를 옮겨 은거했다. 외가가 이처럼 반 나치 성향이었기 때문에, 오드리도 펠프에 거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조직 활동 일부를 돕기도 했다. 아직 오드리는 어린 나이여서 적극적인 활동은 무리였으나,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살려 위장한 [[레지스탕스]] 모임에서 위문차 몇 차례 발레 공연을 했다. 또한 당시 [[네덜란드]]는 연합군 공군 폭격기들이 독일 본토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폭격기들이 격추되고 연합군 승무원들이 불시착하는 일이 잦았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이들에게 은신처, 의복, 식량을 제공해주고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영불해협이나 중립국([[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등) 국경으로 인계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드리의 외가는 이렇게 피신하는 승무원들을 지하실에 숨겨줬으며, 오드리 본인도 의심을 덜 받는 어린이란 점을 이용해 [[레지스탕스]] 조직원들 사이의 물품 배달이나 메시지 전달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https://time.com/5582729/audrey-hepburn-world-war-ii/|#]] 그러다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해오자 오드리의 외가는 점점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마켓 가든 작전]] 당시에는 격렬한 전투는 [[머나먼 다리|다리]] 주변 아른험 시 중심과, 서쪽의 오스테르베크 일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외가 식구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때 오드리 헵번이 부상병 치료를 자원했다가 전투에 휘말렸다는 이야기, 당시 부상병이던 [[007 시리즈]]의 감독 테런스 영을 치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당장 테런스 영은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참전한게 아니라, 영국군 근위 기갑사단 전차병으로 참전해서 강 건너 멀리 남쪽에 있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위기가 [[마켓 가든 작전]] 이후에 찾아왔다. 독일군의 식량공급 차단으로 1944~45년 겨울 네덜란드 대기근[* 1944년 9월에 네덜란드 국철은 연합군의 진격에 호응해 독일군의 증원과 보급을 교란하고자 파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연합군이 아른험 목전에서 멈추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독일군은 보복으로 아직 점령 중이던 네덜란드 영내의 식료품 철도수송을 전면 금지했다. 이 때문에 서부 네덜란드 도시들에서는 농촌으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끊기면서 이 지역 인구 450만 명이 이듬해 1945년 봄까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최소 22,000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이 벌어졌고, 이미 가세가 기운 외가는 이 재난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오드리 헵번과 외가 가족들은 [[튤립]] 구근을 먹고[* [[튤립]] 구근에는 독성이 있어 먹으면 인체에 해롭다.],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근근히 버텼다. 오드리는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이 시기에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빈혈]]과 [[부종]] 등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다. 전쟁 뒤에도 오드리 헵번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외가가 [[마켓 가든 작전]]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아른험 주변 영지와 자산들이 쑥대밭이 되면서, 귀족 작위가 무색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종전 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계속 발레 수업을 받았는데, 외가의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서 어머니 엘라는 귀족임에도 요리사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쟁으로 본인과 집안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오드리 헵번은 이후에도 평생 전쟁영화는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후일 〈[[전쟁과 평화]]〉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으나,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 자체도 처음엔 매우 꺼렸으나 남편인 멜 퍼레어가 간청해서 함께 출연한 것. 로우틴 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 이를 의식해 라이프 지에서는 오드리 헵번을 커버 스토리에 올리면서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발레리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쓰기도 했다. 실제로 오드리의 첫 직업은 발레리나였던 것이다. 이는 우아하고 지적인 오드리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으며 빌리 와일더 감독은 《파계》에서 아프리카 로케이션때 틈만 나면 촬영장에서 책을 읽는 오드리를 보며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도 알 듯한 분위기를 가졌다."라고 했다.], 키가 너무 커서(170cm)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다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인 지명도로 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